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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시장별곡

88년 4월,포항제철 국민주, 역사에서 배우는 주식시장

by lovefund이성수 2014. 4. 11.

안녕하십니까. 시장을 집맥하는 가치투자가 lovefund이성수입니다.

 

1988년 4월 11일, 첫 국민주로 공모된 포항제철의 공모접수가 마감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만으로 정확히 26년전 일입니다. 그 당시의 포항제철은 현재 POSCO로 사명을 바꾸었고 그 당시보다 회사의 위상은 크게 높아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필자의 할아버지에게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포항제철 국민주 공모 관련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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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88년 4월, 국민주 공모가 마감되다.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한 한국증시의 분위기에 당시 정부는 국민주 형태로 저소득층에게도 주식투자로 재산을 불릴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취지로 공모가 진행되었습니다. 결국 4월 11일 공모 마감이 되고 4월 14일이 되어서야 1명당 7주의 포항제철 주식이 배정됨이 그려지게 됩니다. (전산 미흡으로 수작업이 많아서 오래 걸렸을 것입니다.)

 

<<88년 4월, 포철 국민주 청약에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사진 : 경향신문 88년 4월 11일자>>

 

당시 지하철 광고에 초등학교 저학년 모델이 "저도 이제 회사의 주주에요~"라면서 광고가 붙어 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만큼 88년은 올림픽과 더불어 주식열풍 그리고 국민주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지던 때였습니다. 필자도 당시 학생시절, 신문에 있는 주식시세판을 보면서 모의투자를 어설프게 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저의 모습을 보시던 필자의 할아버지는 "어린 놈이 주식은 무슨.."이라면서 핀잔을 주시기도 하셨지요.

그러면서도 9시 뉴스에서 국민주 공모 이야기만 나오면 가만히 뉴스에 집중하셨습니다.

당시 워낙에 큰 공모주 규모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공모주를 신청하였고, 결국 배정된 수량은 1인당 7주, 공모가 1만5천원이었습니다.(장기 보유 신청시 할인 요인이 있었으나, 비율은 적었다고 합니다.)

 

 

ㅇ 그리고 시간은 흘러갔다.

 

1988년 5월에는 가왕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이 88올림픽 분위기와 함께 히트를 칩니다.

그 때 하루 종일 불러서 인지, 지금도 해질무렵 드라이브를 할 때면 입에서 저절로 "해질무렵~ 거리에 나와~~ 서울~ 서울~서울~"노래를 읍조리는 습관이 생겨 있습니다.

 

그 해 종합주가지수는 86,87년의 랠리에 이어서 500p초반에서 출발하여 900p를 넘기면서 마감하였고, 89년에는 종합주가지수가 역사상 처음으로 1000p를 넘어서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동네에 주식투자를 한다는 어떤 아저씨는 동네 꼬마들에게 한턱을 자주 사주시기도 하였고, 뉴스에서는 증권사 객장에 꽉찬 투자자들의 모습을 연일 보여주기도 하였지요.

 

그러다, 1989~90년이 넘어가면서 증시가 침체를 보이고, 92년에는 500p를 깨고 내려가는 등 폭락장이 나타나면서, 동네에서 주식투자로 한턱을 쏘기도 했던 아저씨는 큰 손실을 보았다는 소문만 무성하게 들려왔고, 전세금으로 주식투자에 뛰어들었던 아무개네 아버지는 매일 집에서 바가지 긁히고, 동네 다방에서 허송세월을 보내는 흉흉한 이야기가 주식투자로 인하여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필자의 할아버지는 그저 무덤덤하게 뉴스만 보셨지요. 손에 재산이 없으셨으니, 주식투자도 안하셨겠구나라고 추정만 하였고, 몇해 뒤 노환으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ㅇ 2000년대에 날라온 편지 한장 : 포항제철 국민주 찾아주기 운동

 

워낙에 많은 국민이 국민주에 투자하였지만, 주식을 찾아가지 않아서 2000년대 들어서는 국민주를 공모했던 회사를 중심으로 주식찾아주기 운동이 진행되게 됩니다.

우연히 필자의 집에 편지가 한장 날라오게 되고, 그 편지를 필자의 할머니는 증권계에 들어와 있는 필자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할아버지 이름으로 포항제철(POSCO)주식 7주가 있는데 배당금 등등과 함께 찾아가기 위한 서류절차를 밟으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의 1988년 4월에 있던 주식투자(공모주투자)는 가족들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당시 공모가 1만5천원에 7주를 배정 받으셨으니, 10여만원을 투자하신 것입니다.

당시로도 아주 큰 돈은 아니지만, 쌈지돈을 모아서 공모주를 해보셨던 할아버지의 마음이 상상이 되더군요. 그리고 팔지 않고 기다리시는데, 공모가 근처까지 내려오는 주가를 보시고 약간은 속앓이를 하셨을 것입니다. 가족들 중에 아무도 몰랐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국민주는 할아버지 사망이후 기억에 묻히고, 200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유물처럼 꺼내지게 됩니다.

 

<<POSCO(포항제철)의 1988년부터 최근까지의 주가흐름>>

 

2000년대 중반 POSCO의 주가는 06년에 20만원대에서 07년에 76만원대까지 급등하였는 드라마틱한 급등이 있었지요. 06년 가격으로 치더라도 할아버지의 공모가 대비 10배 이상의 가격이었고, 07년 최고치로 보면 50배가 넘는  수익률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ㅇ 할아버지의 공모주, 손자에게 주식시장을 깨우치게 하다.

 

할아버지의 공모주 투자는 살아계실 때까지도 공모가 대비 좋은 수익률이었고, 2007년에는 50배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전체의 시대적 과정을 훝어보다보면, 주식투자에 큰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1988년 당시 연말 시가총액은 60조원을 넘었던 수준인데, 87년연말에 26조원대에서 급격하게 팽창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가지수 상승률도 있지만, 그 해 국민주 공모는 국내의 증시 유동성을 급격하게 흡수하는 원인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증시 체력이 급팽창한 시가총액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결국 1989년에 시장은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88년부터 1989년을 거치면서 증시에서는 이런 투자 격언이 생기게 됩니다.

"객장에 아기 업은 애기 엄마가 보이면 증시는 상투다"

"시골에서 소팔아서 주식투자하러 객장에 오면 증시는 상투다"

 

 

<<1988년 연말 신문 컬럼, 반대로 지금은 증권社/관련 서적은 大불황을 만끽>>

 

1988년에는 지하철의 광고에서도 "초등학교 저학년"이 주식투자로 회사의 주인이 되었다는 광고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드렸던 바와 같이 전국민적인 주식열풍이 불었던 때입니다.

이 처럼,모든 사람이 주식시장 광풍에 한가운데 있을 때에는 증시는 어김없이 그 화려한 피날레를 날리고 추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장을 짧게 보지 말아야함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당시 거의 대부분의 국민주 청약자들은 바로 매도하였습니다. 공모가 대비 큰 수익이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할아버지의 별세 후 가족들이 모두 모르던 사이 할아버지의 쌈지돈 투자금 10만5천원은 2007년 500만원을 넘깁니다. 하루하루의 파동에 일희일비하여다면 절대 거둘 수 없는 수익률입니다.

 

증시에서는 이런 비슷한 에피소드가 회자됩니다.

어떤 사람이 주식을 크게 사놓았는데, 나쁜 일에 엮이어 1년간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나오게 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주식이 갑절 이상 올라가면서 큰 투자수익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만일 하루하루의 시세에 연연하였다면 그런 수익률을 만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88올림픽이 있던 그해 4월 11일의 첫 국민주 포항제철의 공모마감.

우연히 옛날 달력을 뒤적이다가 다시 보게된 저의 투자지혜의 큰 밑거름입니다.

 

2014년 4월 11일 금요일

결국 POSCO의 주식은 할머니의 병원비로 쓰여졌답니다.

lovefund이성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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