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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시장별곡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90년대 증시는 어떠했는가?

by lovefund이성수 2015. 11. 23.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90년대 증시는 어떠했는가?

한국의 민주화과정에 큰 인물,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에 서거하였다는 소식에 국민들의 조의가 이어주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그 분이 대통령으로서 재임했던 90년대 증시를 다시금 떠올려보았습니다. 임기 초반 랠리가 있었습니다만, 아쉽게도 임기 말에는 IMF사태라는 국가부도에 이르면서 한국증시는 역사상 최악의 증시를 기록하기도 하였던 90년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재임시절 한국증시는 어떠했는지 뒤돌아 봅니다.

 

 

ㅇ 취임 전, 92년 외국인에게 주식시장 개방이 시작되었고..

 

90년대 증시에서 가장 큰 획은 외국인투자자에 대한 시장 개방이었습니다.

92년 1월 첫 거래일부터 시작된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한국 증시 개방으로 첫 거래일이었던 92년 1월 3일, 외국인은 1000억원대라는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의 자금을 집행하였습니다.

소위 PER가 낮은 종목들에 집중적으로 투자자금이 유입되었고, 이로 인하여 외국인의 최신 투자 기법인 "저PER주"열풍이 증시에 불기도 하였습니다.

 

[92년 외국인 증시 개방은 90년대 증시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

[신문자료 : 매일경제 92년 1월 3일자]

 

그렇게 김영삼대통령이 취임하기 전, 주식시장은 먼저 외국인에게 개방되면서 판도라의 상자인 세계화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ㅇ 93년 취임 이후, 경제에 대한 기대감에 94년까지 랠리

 

응답하라 1994, 응답하라 1997년이 몇해전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던 가장 큰 이유는 IMF직전까지 90년대 중반의 경제 그리고 사람들의 심적인 경제적 여유가 그 어느 때보다도 컸었기 때문입니다.

민주화의 결과 90년대 중산층이 두터워졌고 80년대 말, 신도시 정책 등으로 90년대 중반 부동산 가격은 그 이전에 비하여 안정세가 나타나며, 사람들의 경제적 여유가 그 어느 때보다도 컸던 시기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93년~94년 증시에서 먼저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92년까지만 하더라도, 90년 초부터 시작된 깡통계좌 정리 사태로 인하여 종합주가지수는 450p대까지도 밀려내려갔었습니다만, 새로운 대통령에 대한 기대로 93년초 700p까지 반등하였고 94년말에는 1145.66p라는 주가지수 사상최고치를 기록하기에 이릅니다.

 

[김영삼대통령 취임 후 94년까지 증시는 랠리를 이어갔다]

 

 

ㅇ 90년대 증시, 기업들의 배당은 해도해도 너무한 짠돌이 배당

 

90년대 은행이자율은 9.5~10%수준이었고 국채 수익률은 12%를 넘어가기도 하였던 그 시절에 상장기업의 평균배당수익률은 지금과 거의 비슷한 1%대였습니다. (자료 : 배당소득세제의 정책과제, 한국조세재정연구원 2003년)

그나마 90년~92년은 시장하락에 따른 영향으로 주가가 낮았기에 배당수익률이 2%대까지 올라가기는 하였습니다만, 93년 이후에는 1%대의 배당수익률이 고착화 되어버립니다.

 

 

[해도해도 너무했던 90년대 기업들의 배당수익률]

[자료 : 증권거래소,증권통계연보 등]

 

회사 이익에서 배당하는 정도를 알려주는 배당성향의 경우 94년 이전만하더라도 30%대 수준이었습니다만, 94년과 95년에는 아예 배당성향을 20%대 초중반으로 낮추기도 하면서 주가지수 상승에 비하여 기업들의 배당 정책은 매우 실망스러웠습니다.

 

어쩌면, 그 당시 94년의 종합주가지수 1100p대는 과도한 주가 레벨이었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ㅇ 94~95년 증시 초고평가된 주가 수준

 

자산가치 대비한 주가 수준을 나타내는 PBR레벨은 최근 거래소의 경우 1.1배 수준입니다.

이 레벨이 2007년 시장이 과열을 보였을 당시에는 연말에 1.75배를 기록하였었고, 1999년에는 1.6배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 한국증시의 PBR레벨은 이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90년대 한국 종합주가지수와 PBR레벨]

 

91년 1.2배 수준이었던 시장PBR은 94년에 2.85배까지 치솟아 오릅니다. 2000년대 상투장을 만들었던 PBR레벨보다도 훨씬 높은 주가지수 상승 즉, 비이성적인 랠리가 90년대 중반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대신 80년대 후반 광풍 후휴증으로 인해 전국민 주식 광풍은 아니었습니다만, 외국인투자자 유입등으로 시장 주가 수준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고평가 영역에 들어가 있었고, 결국 95년부터 주가지수는 하락하기 시작하면서 으산한 안개처럼 시장과 경제에 불안감이 엄습해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93년 대전엑스포, 95년 1인당 GDP 1만$돌파, 96년 OECD가입 등으로 세계화라는 판도라의 상자는 90년대 후반 한국 경제에 재앙을 안겨주게 됩니다.

 

 

ㅇ 일장춘몽으로 끝난 90년대 증시 그리고 악몽속의 97년

 

97년 초부터 악몽은 시작되었습니다.

97년 한보철강 부도를 시작으로 대기업들의 연쇄부도가 이어졌고, 97년 7월에는 태국 바트화 폭락, 8월에는 인도네시아 루피화가 폭락하기에 이르는 가운데, 97년 가을 아시아권 증시를 중심으로 전 세계 증시가 공포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해 11월에는 한국 가용외환 보유고가 20억$ 밖에 안된다는 불룸버그 뉴스가 나온다 싶더니 11월 말, 정부는 IMF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IMF사태가 터지고 경제와 증시는 재앙의 늪으로 빠져들어가게 됩니다.

 

[세계화는 IMF사태로 침몰하였고...]

 

ㅇ 많은 교훈을 남긴 90년대 증시

 

IMF가 임기말에 발생하였다보니, 김영삼대통령의 치적에 IMF라는 큰 흠이 남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임기초의 금융실명제, 하나회척결, 민족자존심부흥, 민주화 등 90년대 초중반의 경제와 증시에는 긍정적인 효과도 분명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90년대 증시는 흥망성쇠를 너무도 빠른 시간에 진행하면서 투자자들에게 큰 교훈을 남겼습니다.

 

고평가된 주식시장의 끔찍한 결말,

당시 관치금융을 벗지 못했던 기업들의 고부채 정책의 말로

그리고 힘든 기간이었지만, IMF증시 이후에 펼쳐진 빠른 증시 회복 등

 

90년대 증시는 많은 교훈을 투자자들에게 20년이 지난 지금도 남겨주고 있습니다.

그 교훈을 바탕으로 앞으로 미래를 투자하는데 그림을 그리는데 참고해야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고인이 되신 김영삼 전대통령의 명복을 빕니다.

 

2015년 11월 23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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