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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시장별곡

토토가를 통해 보는 1990년대 증시

by lovefund이성수 2015. 1. 6.
토토가를 통해 보는 1990년대 증시

2주일에 걸쳐, 무한도전 토토가 열풍은 그치질 않고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시장을 집맥하는 가치투자가 lovefund이성수입니다

90년대를 추억하는 이들의 감수성을 터트린 무한도전 토토가(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열풍이 식지를 않고 있습니다.

식당을 가도, 미용실을 가도, 커피숍을 가도 토토가에서 나온 1990년대 음악은 무한반복되며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1990년대를 추억하게 하는 그 노래들을 듣다보면, 1990년대 증시가 어떠했는지 주식시장에 발을 담그고 있는 입장에서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응답하라 1997,응답하라 1994, 건축학개론 그리고 토토가 1990년대 열풍

 

토토가 열풍이 1990년대를 회상케 하는데 (사진 : MBC 무한도전, 토토가 캡쳐)

 

2년전부터 1990년대의 추억을 되곱게 하는 드라마,영화들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대표적인 드라마로는 응답하라 1997, 응답하라 1994가 있을 것이고, 영화에서는 건축학개론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중산층이 가장 두터웠던 시기였던 1990년대 중반. 인(IN)서울대 졸업만 해도 취업은 거의 당연시 되었던 90년대 중반.

정치적으로는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군부정권이 물러나면서 자유로운 생각과 문화가 분출되었기에,어찌보면 마음이 풍요로웠던 그 시기를 그리워하는 지금 30~40대 그리고 50대의 마음 속에는 아름다웠던 추억일 것입니다. 하지만, 국가부도라는 단군이래 최악의 사태도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1990년 증시는 어떠했을지, 타임머신을 타고 떠나보겠습니다.

 

 

▶ 90년~92년 고난의 3년, "깡통계좌" 증시 용어가 생겨났던 시기

 

1990년대 초반 증시는 89년까지 이어진 상승장을 뒤로하고, 90년 본격적인 하락장이 이어지면서 투자자들의 고통이 극단으로 치달았던 시기였습니다.

80년대 후반, 전국민의 주식 열풍은 증권사 객장에 개인투자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게 하였고, 시골에서는 논팔아서 소팔아서 주식투자에 뛰어든 농부들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리던 시기였습니다.

심지어는 80년대 후반 국민주(포철,한전 등)를 홍보할 때에는 초등학생 모델이 "저도 이제 주주에요"라는 광고가 지하철에서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광풍의 증시가 치닫던 그 시기에는 투자자들은 투자원금보다도 더 많은 금액을 투자하기 위하여 레버리지 투자가 당연시 되었고, 주식시장이 침체장에 접어든 90년 결국 담보유지비율이 100%를 밑도는 계좌들이 속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90년대 초반 깡통계좌 정리사태는 당시 증시 상황을 대표한다

 

이를 보다못한 금융당국은 1990년 10월 10일에 담보유지비율 100%미만인 깡통계좌를 일괄반대매매하기에 이르릅니다. 당시 정리대상 계좌수는 1만3천여개, 금액은 3천억원으로 추정될 정도로 그 규모는 25년전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깡통계좌가 강제 정리된 후 증시는 잠시 급반등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증시는 91년~92년에 또 다시 급락하면서 다시 깡통계좌가 늘어나면서, 침체장은 반복되었습니다.

 

 

▶ "잠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 김건모 데뷰 하던 해, 증시는 변하고 있었다.

 

1992년은 우리증시가 글로벌증시에 개방되는 원년이었습니다.

지금은 익숙한 외국인투자자가 그 당시, 한국증시에 첫 발을 내딛었던 것입니다. 시장은 외국인의 매수로 미리 흥분하였지만, 주가지수는 재미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1992년 8월 456p까지 하락하면서, 암울함만 커졌습니다.

하지만 1992년 증시에는 외국인투자자의 등장으로 큰 획을 증시 역사에 남깁니다.

 

그것은 바로 외국인투자자들이 사용한 "가치투자 지표"인 PER가 한국 개인투자자에게 알려지면서 "저PER주 열풍"이 불었던 것입니다. 증시 개방 첫날 1천억원대 외국인이 매수하는 등 새로운 모멘텀이 작용하면서, 당시 저PER주 열풍은 뜨거웠습니다.

 

저PER주 열풍의 중심에 있었던 92년대 당시 태광산업 주가

 

연초대비 4배 이상 저PER주들은 개인투자자들은 뒤늦게 뛰어들면서, 그 열기는 더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과열은 폭락을 만들게 되면서, 92년 여름 시장 모멘텀의 부재 속에 종합주가지수는 허무하게 456p까지 내려옵니다.

 

그리고, 가수 김건모가 "잠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로 더뷔를 하던 가을을 기점으로 증시는 상승장으로 돌아서게 되고, 김영삼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시작됩니다.

 

 

▶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그 기대는 증시에 그대로 나타나다

 

군사문화로 경직되었던 사회가 급속히 풀리던 때가 1993년부터입니다.

금융실명제가 전격적으로 시작되었던 1993년입니다만, 새로운 정부에 대한 기대는 증시상승으로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 해 93년은 선진국 증시의 기법이라 불리우던 PER와 PBR 밸류에이션 측정 방법이 국내 증시 투자자들에게 보급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카더라통신"에 의존한 뇌동매매가 횡횡하였고, 심지어는 증권사 지점장이 역술가에게 가서 종목을 점지해 달라고 요청하는 웃지 못할 일들도 흔한 일이었습니다.

 

90년대 중반 증시는 승승장구하던 상승장

 

김건모의 '잠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로 데뷔를 하던 92년 가을 종합주가지수는 600p대에 있었지만, 그 여세는 계속 이어져 1994년 11월 1145.66p까지 상승하며 종합주가지수 최고치를 경신하기에 이릅니다.

그 시기 경제도 훈훈하게 이어지면서, 중산층이 매우 두터워지고 경제적인 마음의 여유가 크게 높아지면서 문화가 폭발하고 1995년에는 90년대 히트곡들 중 대부분이 쏟아지게 됩니다.

 

95년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을 시작으로 터보의 검은고양이, 박미경 이브의 경고, 이승환 천일동안, 박진영 청혼가, 육각수 흥보가 기가막혀, 쿨 작은기다림, 이소라 난 행복 해 등등등 이번 무한도전 토토가의 추억의 단초가되었던 노래들이 쏟아지게 됩니다.

 

하지만... 20년 전인 1995년을 기점으로 당시 한국 증시는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합니다.

 

 

▶ 1990년대 후반, IMF의 공포가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하다 터지다

 

1990년대 후반 증시는 IMF 사태 등 다시 3년간의 하락장이 이어지다

 

90년대 중반부터 사회적으로 문제가 터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급속 성장의 후휴증이 사회전반에서 나타나면서 여러가지 인재가 속출하였습니다. (굳이 사건 이야기는 언급드리지 않겠습니다. 국민 모두의 상처로 남아있기에.) 그리고 1995년부터 증시는 서서히 약세국면으로 꺽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96년까지는 그래도, 심각하게 보지는 않았습니다. 큰 상승 후에 쉬어가는 흐름 정도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런데 복선이 깔리는 현상이 1996년 폐장일에 나타났습니다.

종합주가지수가 연중최저치로 마감되면서 개장이래 첫 "연중 최저치 폐장"이라는 기록을 만들게 됩니다.

96년 주가지수 하락률은 26%에 이를 정도로 제법 깊은 하락이었습니다.

그러면서 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때 주가인 "문민주 655.61p"까지도 무너트리고 맙니다.

그리고 1997년 IMF시기는 시한폭탄처럼 다가오게 됩니다.

 

1997년 증시는 IMF증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연중 내내 이어진 굵직한 기업들의 부도사태. 한보철강을 시작으로 삼미,진로,대농 등 30대 대기업의 연이은 부도와 자금악화설은 증시를 추풍낙엽처럼 무너트리게 됩니다.

아시아발 위기로 불리우기도 했던 당시 위기는 태구 바트화 폭락을 시작으로 전염병처럼 아시아지역 전체에 위기를 퍼지게 하였고, 결국 1997년 11월에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릅니다.

종합주가지수 하락률 -42%로 96년 376.31p라는 치욕적인 주가지수로 마감한 97년 증시는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겨주었습니다.

그 어렵던 시기에 SES가 데뷔를 했었고 힘든 시기에 국민들에게 작은 위로를 안겨주었지요.

 

1998년 증시는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격언을 떠올리게 한 한해였습니다.

97년말 구제금융을 신청 한 이후 증시가 회복세를 보였다가 여름들면서 폭락장이 나타나며, 98년 6월 277.37p까지 하락하게 됩니다. IMF구제 금융의 조건인 칼을 깍는 구조조정이 이어지는 가운데 기업실적이 크게 악화되었고 명예퇴직이 줄을 이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98년 여름 이후 시장은 갑자기 턴어라운드하기 시작합니다.

98년 사상최고 기록이 쏟아져 나옵니다.

주식거래량이 3억 9천만주를 넘기고 거래대금도 3조3천억원을 넘기면서 당시 사상최고치 기록을 갈아치웠고, 고객예탁금도 5조2768억원이 유입되며 신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그 시기 조성모의 "To Heaven"은 다음 해 증시가 급등할 것을 암시하기라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 1999년 1월 이정현이 연기자에서 가수로 데뷔를 하던 그 해 증시는 IT붐과 함께 다시 종합주가지수는 1000p를 달성하게 됩니다.

 

 

▶ 지난 20년 앞으로 20년

 

2015년, 20여년 전인 1990년 대...

그 20여년동안 우리 증시는 큰 발전이 있었습니다. 규모면에서 그리고 질적인 측면, 투자철학과 투자문화,제도 모든 면에서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그 사이 큰 부침이 있었지만, 시장은 살아남아 있습니다.

분명 어려운 시기도 있었지만, 시장은 꾸준히 상승을 이어왔습니다.

 

앞으로 20년, 어쩌면 90년대처럼 크나큰 부침이 있을 수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한해 한해 횡보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확실한건 20년이라는 장기 트렌드 안에서는 경제 성장과 함께 상승장이 이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흐름 속에 시장에서 생존을 하시고 시장을 조금만 앞서나가기만 하셔도 시간은 여러분들께 복리라는 힘으로 추억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20년 뒤, 지금의 아이돌그룹과 K팝스타를 떠올리며, 20년 뒤의 토토가를 하고 있을 때 지금을 아름답게 추억하시기 바랍니다.

 

2015년 1월 6일 화요일

lovefund이성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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