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前총리의 별세 소식:증권파동과 통화 개혁이 떠오르다.
김종필 前총리의 별세 소식이 주말 사이에 있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꼭 등장하던 인물 김종필. 그러다 보니 다양한 평가들이 사후에 이어지며 갑론을박 의견들이 기사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김종필 전 총리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필자는 증권가와 금융역사에 그와 관련된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바로 증권파동과 3차 통화 개혁입니다.
ㅇ 1962년 증권파동, 김종필의 4대 의혹 : 그 후 십여 년 증권시장은 제 구실을 못하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동의 시절이었습니다. 1960년 419 민주화 혁명,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있었습니다. 2010년대 후반 현재도 격동의 시기입니다만 그 시절은 하루하루가 세상이 뒤집어지는 그러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한 "제3공화국"이라는 드라마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인기 있는 드라마가 되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1962년 당시 증권거래소는 여의도가 아닌 서울 명동에 있었습니다. 상장 주식이 겨우 12 종목에 불과했고 거래량에 93%를 차지한 종목은 겨우 대증주(증권거래소), 연증주(증권금융), 한전주(한국전력) 이렇게 3 종목이었던 그 시기 통화량 증가와 급격히 늘어난 시중 부동자금은 분위기가 맞아떨어지면서 증권파동을 만들게 됩니다.
이 증권파동의 상승장은 1962년 봄부터 시작하여 5월 피크에 이릅니다.
[1962년 5월 증권파동을 묘사한 옛 드라마 제3공화국 한 장면]
[사진 참조 : MBC 드라마 제3공화국 11화 캡처]
원인을 알 수 없는 상황 하에서 세력들의 책동전이 벌어지며 대증주의 주가가 120배까지 끌어올려졌습니다. 그 시기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공모주 투자와 주식투자를 하면 주식투자를 하면 대박 난다는 소식에 너도나도 명동 증권 시장으로 뛰어들었고 그 당시에는 외상 주문이 판을 치면서 주가는 끝없이 올라가는 분위기였습니다.
결국 5월에 책동전은 종국에 이르면서 5월 증권 파동을 만들었고 급기야 당시 정부(?)는 증시 파탄과 중소 투자자(개인투자자)의 파산을 막기 위해 긴급 융자를 단행하며 5월 30일과 6월 1일에 28억원의 긴급자금을 의결하는데 당시 통화량에 10%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그렇게 해도 진정이 안된 폭락장으로 인해 6월 11일부터 한 달여 휴장 하기도 하였지만 9월에는 최고치 대비 1/50 수준까지 폭락하는 큰 상처를 증시에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 증권파동의 회오리는 1963년 2월까지 1년여라는 짧은 기간 광란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 짧은 기간 큰 피해를 나으면서 기록에 따라 틀리지만 5300명의 개인투자자들의 파산을 했다 하기도 하고, 혹은 피해자가 수만 명에 이를 정도라 하는 등 증권파동으로 인해 이후 10여 년간 증권시장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증권파동은 그 시절 중앙 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의 4대 의혹 중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의혹입니다. 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빠찡꼬 사건 등이 바로 김종필의 4대 의혹이었습니다.
증권파동에 중앙정보부가 개입되었다는 이야기가 계속 있어왔지만 1963년 김종필의 외유와 함께 유야무야 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김종필씨의 경우 증권 파동 재판이 진행되던 시기 해외에 나가 있다는 이유로 기소유예되었고 1963년 재판에서 관련자는 모두 무죄 판결받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증권파동 이야기에는 꼭 김종필 전 중앙 정보부장이 언급되지만 "의혹"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이야기는 마무리되곤 합니다.
ㅇ 1962년 통화 개혁 당시 깊이 개입한 중앙정보부
[옛 김종필 중앙 정보부장 시절 사진, 사진 참조 : MBC뉴스]
1962년 6월 10일, 당시 군사정부는 10환을 1원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단행합니다. 당시 인플레이션이 가파르기도 하였고 소위 장롱에 숨어있는 돈을 꺼내어 경제에 불을 지펴보겠다는 취지, 혹자는 화교들이 꽁꽁 숨긴 현금을 꺼내겠다는 이야기도 있고 부정축재자를 색출하겠다는 목적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통화 개혁이 단행되었습니다.
1,2차 통화 개혁은 625 전쟁 시기에 있었다 보니 이를 묶어서 1차 통화 개혁이라 하기도 하기에 자료에 따라서는 1962년 610 통화 개혁을 2차로 부르기도 하고, 또는 총회차를 세어 3차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 당시 워낙 비밀리에 화폐를 인쇄했어야 했기에 영국에서 신권을 인쇄하여 왔다 하지요. 그러다 보니 지폐에 인물들이 코가 높은 백인 얼굴이었다는 후문이 있기도 합니다.
1962년 6월 13일 자 동아일보 "통화개혁은 이렇게 꾸며졌다" 기사에서는 비밀리에 진행되었던 3차 통화 개혁의 과정들이 상세히 기술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사 중간에 김종필 중앙 정보부장이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당시 화폐 개혁은 극비리에 추진되었는데 당시 화폐 개혁 주역 4인은 비밀 유출 시 사형을 당하겠다는 각서를 썼을 정도로 비밀리에 추진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시 미국 버거 대사도 뒤늦게야 사실을 알게 되었을 정도였습니다.
"최신 무기"로 가장한 지폐 화물을 인수하는데 김종필 중앙 정보부장이 부산 현장에 나가 있었다 합니다. 그러면서 기사에서는 중앙정보부의 공로 그리고 치밀한 활동이 아니었다면 화폐 개혁의 비밀은 불가능했을 것이라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 경제적 혼란과 예상외로 숨겨둔 자금들이 경제로 나오지 않으면서 예상외의 부작용이 발생되는 등 오히려 큰 경제적 부담만 남겼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혼란을 겪었고 인플레이션이라는 심리가 더욱 자극받았을 뿐입니다.
(당시, 필자의 조부께서 화폐 개혁 직전 친척에게 결혼자금을 큰돈을 빌려주었는데 화폐 개혁 후 수년 뒤 돈을 받으러 가니 옛날 화폐 가치만큼인 솜 한통을 받고 왔다는 슬픈 이야기도 있습니다.)
김종필 前 총리의 별세 소식, 사람들에게는 3김 시대의 저물었다는 의미를 던지겠습니다만 필자의 경우는 과거 반세기 전 4대 의혹 중 하나인 증권파동과 통화 개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증시 토크에 지금이 가장 글로 남기기에 적합할 듯하여 글로 정리해 봅니다.
2018년 6월 25일 월요일
lovefund이성수(CIIA charter Holder, 국제공인투자분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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